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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디자인

브랜드 위키 - 코카콜라 Coca-Cola

by 유익환 2022. 7. 16.

의사이자 약사인 존 스티스 펨버턴은 애틀랜타에 있는 그의 연구소에서 상당수의 약품과 치료제, 화장품을 조제하다가 1885년 12월 예전의 사업 파트너인 에드워드 홀랜드 그리고 두 명의 광고 전문가 프랭크 로빈슨과 데이비드 도와 함께 펨버턴 케미컬 컴퍼니를 창립했다. 1886년 초에 펨버턴은 페루의 코카잎, 서아프리카 코카 열매, 설탕, 카페인, 레몬즙, 바닐라 추출물, 캐머멜, 오렌지오일, 육두구오일, 계피유, 고수오일, 등화유, 레몬오일 같은 성분으로 탄산이 함유된 청량 음료를 만들어냈다. 당시엔 특별한 음료가 아니었다. 이전에도 소다수에 이런저런 합법적인 향료, 약초 그리고 뿌리 섞은 음료가 아주 다양하게 존재했다. 산소를 발견한 영국의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1767년 천연 미네랄워터의 대체품으로 값이 싼 탄산수를 생산한 이래로 소다수는 미국 일상의 한 부분이었다. 당시에는 첨가물이 있든 없든 소다수가 청량음료로서뿐만 아니라 종종 의약품으로도 판매되었다.

신제품 음료수는 더운 남부의 대도시 애틀랜타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특히 1886년 여름 공식적으로 알코올 금지법이 발효됐기 때문이었다. 프랭크 로빈슨은 코카콜라라는 이름을 짓고 필체로 기록해놓았다. 그것이 바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상표였다. 1888년 펨버턴이 사망하고 난 뒤에 창업자, 투자자 그리고 상속자 간에 불투명한 재정적 거래 때문에 제조공식과 상표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고 이 분쟁은 약사인 아사 그릭스 캔들러의 승리로 이어졌다. 1892년 그는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코카콜라를 설립했다.

새로운 소유주들은 대대적인 광고와 미국 전역에서 '코카콜라 종교'를 선교할 베테랑 군대를 동원해서 코카콜라를 가히 국민적 음료수로 치켜세우는 데 전력을 다했다. 1894년부터 코카콜라는 병에 담겨 판매되었고, 1899년에는 날로 커져가는 시장에 공급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외부의 보틀링 회사에 라이선스를 허용했다. 1902년 조지아 주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해한 보편적 치료제로 여겨졌던 코카인의 판매를 금지했고, 이후 음료수에 코카인을 첨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코카콜라는 1920년대에 유럽에도 공장을 설립하고 독일에서는 1929년 4월 에센에서 처음으로 코카콜라가 판매했다.

1941년 미국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참가했을 때 독일 자회사에 대한 원액 공급이 중단되었다. 당시 코카콜라의 최고 경영자였던 맥스키스는 선견지명을 가지고 이미 1년 전에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 두었다. 그것은 생필품 배급으로 물자가 부족한 점을 감안하여 식품 제조 과정에서 나오는 부산물에 카페인을 첨가시킨 과일 레모네이드였다. 유장, 사탕무에서 뽑아낸 설탕, 사과 부스러기 등이 주 재료였다. 향은 어떤 과일을 넣느냐에 달려 있었다. 새로운 음료에 이름을 붙이기 위해서 키스는 직원들을 소집해 판타지를 발휘해보라고 지시했다. 판매사원인 조크니프는 환타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전시 기간 내내 독일과 몇몇 유럽의 코카콜라 자회사들은 환타 레모네이드만 생산했다. 미국 모회사는 1949년에 가서야 다시 코카콜라 원액을 독일에 공급해주었다. 1960년에는 환타가 미국에 출시되었다.

같은 해 코카콜라는 세븐업에 대한 경쟁제품으로 레몬 레모네이드인 스프라이트를 출시했다. 스프라이트라는 이름은 1942년부터 사용한 광고 주인공 '스프라이트 보이'에서 따온 것이다. 스프라이트 보이는 코카콜라 병뚜껑 모양으로 된 모자를 슨 요정으로, 1941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된 두 번째 브랜드 코크에 투입됐다. 스프라이트는 영어로 '요정' 혹은 '난쟁이'라는 뜻이다.

이제 코카콜라를 막을 것은 없었다. 외교관이나 정치가들이 이룰 수 없는 것을 코카콜라는 쉽게 해낼 수 있었다. 어디로 가든 그들 앞에서는 문이 저절로 열렸다. 심지어 미국을 증오하는 피델 카스트로조차 코카콜라를 마시는 모습이 언론에 공개됐다. 미국 정권과는 단 한번도 외교적 관계를 맺지 않는데 말이다. 코카콜라는 점점 더 아무도 피할 수 없는 현대의 종교가 되었다. 한 코카콜라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딜 가든, 사람들은 내가 코카콜라에서 일한다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사람들은 마치 나를 바티칸의 대리인인 것처럼, 신과 접촉한 것처럼 대했다.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이 제품에 대해서 사람들은 일종의 경외심을 지니고 있었다." 코카콜라의 광고 대행사 매캔에릭슨의 최고경영자였던 폴 폴리는 문제를 좀더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우리는 몽상을 판매한다. 사람들은 제품이 아니라 이미지를 마신다."

코카콜라가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한 것은 대대적인 광고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전 세계인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코카콜라로 인해 생겨났던 많은 브랜드를 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미국에는 수백 가지의 다양한 콜라 브랜드가 존재했다. 물론 그 가운데서 살아남은 것은 거의 없다. 

1985년에 100년이 된 코카콜라 제조법을 약간 바꾼 것이 기업의 엄청난 실수였다. 미국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길이 없었다. 매일 같이 수천 통의 전화가 본사로 걸려왔고, 격렬한 항의편지가 셀 수 없이 쏟아졌다. 좀 더 달콤한 새로운 콜라는 언론에서도 참패를 맞이했다. 코카콜라의 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마치 우리가 하느님이라도 살해한 것처럼 말한다." 3개월이 지나지 않아서 실험은 종지부를 찍었다. 코카콜라는 다시 전통적인 맛을 되찾았다.

코카콜라는 오늘날 전 세계 그 어떤 브랜드보다도 월등하게 성공한 브랜드다. 애틀랜타에서 온 갈색 음료는 거의 모든 국가에서 구입할 수 있고, 오지의 작은 마을에서도 빨강과 흰색의 광고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