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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디자인

브랜드 위키 - 나이키 Nike

by 유익환 2022. 7. 14.

스탠퍼드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경제학도이자 중거리 육상선수인 필립 나이트는 운동화가 너무 비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미국 시장이 독일의 아디다스와 푸마에 지배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진정한 미국의 애국자라면 참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졸업과제로 해결책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이트는 가격을 낮추기 위해서 임금이 싼 아시아 국가에서 제조할 것을 추천했다.

필립 나이트는 1962년 학업을 마친 뒤 일본으로 가서 스포츠화 제조업체인 오니츠카 타이거 컴퍼니의 사장과 만났다. 일본인들이 그에게 어떤 회사에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당시 최고의 미국 육상선수들에게 수여되었던 파란색 어깨끈을 떠올리고 그 자리에서 블루 리본 스포츠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결국 그는 일본 운동화의 수입 라이선스를 따냈다. 미국에 돌아온 나이트는 바로 자신의 트레이너인 윌리엄 바워먼과 공동으로 기업을 설립했다. 아직까지 그의 본업은 회계사였다. 1963년 12월 첫번째 주문물량인 운동화 200켤레가 회사가 있는 오리건의 포틀랜드에 도착했다. 값싼 운동화가 잘 팔리자, 이전에 수작업을 운동화를 만든 적이 있던 빌 바워먼은 1960년대 중반 직접 운동화를 디자인해 타이거 라벨을 붙여서 판매했다.

1972년에 일본과 사이가 나빠졌을 때 블루 리본 스포츠는 그리스 승리의 여신의 이름을 따서 나이키라는 자체 상표를 도입했다.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로고는 디자인을 공부하던 학생인 캐롤린 데이비드슨이 나이키 여신의 날개를 보고 고안해낸 것이다. 그녀가 디자인의 대가로 받은 돈은 35달러였다. 당분간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나이키 디자이너들은 포틀랜드에서 10분 떨어진 비버턴 시내에서 신발을 디자인했지만 생산은 멀리 떨어진 아시아의 저임금 국가에서 이루어졌다. 1947년에야 미국에 공장을 세웠다.

그 후 나이키가 세계적인 브랜드의 선두주자로 상승한 것은 스티브 프리폰테인, 존 매켄로, 마이클 조던 같은 세계적인 스포츠인들을 등장시킨 광고와 운동화, 운동복, 조깅 장비 등이 운동선수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점차 여가복으로 떠오른 트렌드와도 연관성이 있다. 아디다스나 푸마는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한 사실이었다. 마이클 조던은 나이키의 신발을 착용하고 NBA 무대를 누볐고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었던 그만의 농구 기술은 나이키의 명성을 끌어올리는데 일조했다. 마이클 조던의 덩크슛 포즈를 그대로 가져와 만든 'JUMPMAN' 로고와 함께 에어조던 운동화는 나이키 스타마케팅의 결정체였다. 나이키는 NBA 루키였던 마이클 조던을 적극 활용하였다. 나이키는 1985년 '조던 플라이트'라는 첫 시리즈 광고를 내놨다. 마이클 조던이 프리드로우 라인에서 날아올라 덩크슛을 하는 장면이 담긴 이 광고의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나이키는 그 해에만 에어조던으로 1억 3000만달러의 매출을 기록했다. 이런 고무적인 성과에 나이키는 NBA 사무국이 색이 들어간 운동화를 착용금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1000달러에 달하는 벌금을 물어가면서 마이클 조던이 에어조던 운동화를 착용하게 했다. 그 결과 급격한 매출 성장으로 나타났고 에어 조던은 매년 10억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효자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1988년 나이키는 그 유명한 슬로건 "Just do it!"을 도입했다. 이 슬로건은 40년간 유지되었다.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라는 뜻으로, 오랫동안 나이키의 정신적인 상징이자 혁신적 가치로 자리잡았다. 지난 2020년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슬로건에서 새로운 슬로건 "You can't stop us"를 내걸었는데, 이와 함께 발표된 영상 또한 파격적인 효과가 있었다. 나이키가 들어간 세계 여러 나라 스포츠 영상들을 한 영상으로 어우른 데다가 퀄리티까지 훌륭하여 호평과 함께 좋은 의미로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2003년 나이키는 미국의 농구화 제조업체 컨버스를 사들였다.